<<슬기로운 의사생활>>: 10년이 지나도 우리가 다시 돌아오는 이유
처음 이 드라마를 켰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며 앉은 건 아니었다. 그냥 피곤한 날 밤이었고, 리모컨을 들 기력도 없어서 자동재생되는 걸 그냥 놔뒀다. 그런데 첫 화 끝날 즈음에 눈가가 촉촉해져 있더라. '어, 이거 뭐지?' 싶어서 두 화 더 봤다. 그게 시즌 1 전편 정주행의 시작이었다.
병원 이야기인데, 병원 이야기가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무대는 율제병원이다. 20년 지기 친구 다섯 명이 각자의 과에서 일하면서 다시 모인다는 설정이다. 의학 드라마라고 하면 보통 어떤 그림이 떠오르냐면, 수술실의 긴장감이라든가 희귀 병명을 단번에 짚어내는 천재 의사라든가,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기대를 첫 화부터 살짝 비껴간다.
응급실 알람이 울리고 이송 침대가 밀려오는 장면이 없는 건 아니다. 있다. 그런데 카메라는 금방 그 긴장감 뒤의 복도로 넘어간다. 자판기 커피를 뽑는 장면, 대화가 없어도 함께 있는 장면. 드라마가 말하고 싶은 건 수술 장면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의 시간인 것 같았다.
공식 기획 의도에 이런 문구가 있다. '언제부턴가, 따스함이 눈물겨워진 시대.' 읽고 나서 잠깐 멈췄다.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문장인데 이상하게 맞는 말처럼 들렸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위로를 찾는 건 현실이 그만큼 팍팍하기 때문이니까.
감동이 아니라 공감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울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나중에 왜 울었는지 생각해보면 드라마 속 의사가 위대해서가 아니다. 5명의 주인공이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영웅 같은 인물들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버티고, 옆 사람과 밥 한번 같이 먹고, 말 못 할 고민을 혼자 들고 다니다가 결국 친구에게 꺼내놓는 사람들이다.
그게 울리는 거다. '나도 저런 적 있는데' 하는 그 순간 말이다. 가족이 입원해 있던 기억, 병원 복도에서 의사를 기다리던 기억, 아니면 그냥 지쳐서 화장실 가서 혼자 웅크리고 싶었던 날들. 드라마가 그걸 직접 건드리지 않는데도 어느 순간 그 기억들이 올라온다. 그게 '공감'이고, 이 드라마가 '감동 드라마'가 아니라 '공감 드라마'인 이유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같이 들고 걷는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풀지 못한 고민을 다음 화로 넘기는 걸 자주 본다. 의사로서 환자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이 들어 20년 전과 달라진 자신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이런 것들이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대신 5명이 함께 밥을 먹거나, 밴드 연습을 하거나, 별말 없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그 고민을 조금씩 묵혀간다.
외국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낯설어하는 부분 중 하나가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서사에서 갈등이 명확히 해소되지 않는 구조. 한국 드라마 하면 반전이나 막장 전개를 상상하는 사람들한테는 이게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이 드라마의 방식이다. 해결이 아니라 동반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하는 일
병원이라는 장소를 소재로 쓰는 방식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꽤 독특하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삶을 마감하는 공간. 그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극적인 대비를 의도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죽음 장면이 나와도 배경음악이 크게 깔리지 않는 경우가 있고, 탄생의 순간도 조용하게 지나갈 때가 있다.
신원호 PD의 연출 방식인데, 일상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감정을 쌓아가는 방식이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율제병원 직원들의 일상에 편입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점이 시즌이 끝나고도 계속 그 공간이 그리워지는 이유 중 하나일 거다.
오랜 기간 투병했던 가족을 둔 시청자들 중에는 병원이 배경인 드라마가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때 기억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 층의 시청자들에게도 오히려 위로가 됐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병원이 그렇게 무겁지 않게 그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저런 의사가 어딨어?' 하면서도 그 의사가 존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묘한 균형.
성장 드라마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이 드라마를 의학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성장 드라마라고 부르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직접 말하긴 어렵지만, 시즌 1 시작의 다섯 명과 시즌 2 끝의 다섯 명은 사건이 쌓인 만큼 달라져 있다.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게 아니라 조금 더 어른이 된 느낌. 고민을 혼자 들고 다니던 사람이 말할 수 있게 되고, 말하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걸 지켜본 시청자도 같이 그 과정을 통과한다. 보면서 웃고, 보다가 울고, 나중에 '맞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고 자기 이야기와 겹쳐놓는 것. 드라마가 제 역할을 하는 방식이 이런 거라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 역할을 꽤 성실하게 해낸 시리즈다.
왜 10년이 지나도 돌아오는가
드라마가 방영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런데 지금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생기고, 다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새로 K-드라마를 시작하는 외국 시청자들에게 "뭐 보면 되냐"고 물으면 이 드라마 이름이 꽤 자주 나온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클립을 통해서 접하는 경우도 많다.
왜 다시 돌아오느냐고 하면, 아마 이 드라마에는 '다시 봐도 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20년 지기 친구들이 서로를 다루는 방식, 아무것도 설명 안 해도 알아주는 장면들, 밴드 연습실에서 아무 의미 없이 웃는 시간. 시청자가 처한 상황이 달라지면 같은 장면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처음 봤을 때 그냥 지나쳤던 장면이 두 번째 볼 때 멈추게 만드는 거다.
이 드라마가 남긴 것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이것 하나다. 반전을 기대하고 보면 심심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고 지쳐서 그냥 틀어놓을 드라마가 필요한 순간에, 이 드라마는 꽤 정확한 자리에 있다.
복잡한 걸 풀어야 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냥 같이 있어주는 드라마다. 율제병원 복도에 잠깐 앉아 있다 오는 느낌. 그게 10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이 드라마로 돌아오는 이유일 거다.
글: Jacky — 제주·서울, KStoryWorld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