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맥이 세계어가 된 날: 별에서 온 그대가 바꾼 치킨과 맥주의 운명
어느 저녁, 드라마 한 장면이 메뉴판을 바꿨다
오래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문화를 진짜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은, 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 장면 안에 있고 싶다는 감정이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2013년 말,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 온라인 플랫폼을 타고 번졌을 때, 극 중 전지현이 눈보라 치는 밤에 창가에 앉아 치킨을 뜯고 맥주를 마시는 장면 하나가 검색어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중국 시청자들이 그 장면을 재현하겠다며 한국식 치킨집을 찾아다녔고, 없으면 직접 만들어 먹겠다며 레시피를 공유했습니다. 음식이 유행한 게 아니었습니다. 장면이 유행했고, 음식은 그 장면의 입장권이었습니다.
그 흐름은 조용히 오래 이어졌고, 결국 하나의 단어로 굳었습니다. "치맥(Chimaek)." 치킨과 맥주를 합친 이 단어는 2021년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정식 등재되었고, 당시 OED는 등재 배경을 설명하면서 <별에서 온 그대>를 직접 언급했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 밖에서 대중화된 문화"라고.
치맥이 사전에 오르기까지
드라마가 만든 행동 반응
외국인 시청자들이 K-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 중 하나가 음식 장면입니다. 그것도 거창한 정찬이 아니라, 야근 후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 하나 따는 장면, 스포츠 중계 틀어놓고 치킨 상자 뜯는 장면 같은 것들입니다. 일상의 감각을 건드리는 디테일이 오히려 더 강하게 작동합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치맥 장면은 바로 그 지점에서 터졌습니다. 화려하지 않았고,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냥 비 오는 밤에, 창문 앞에서, 치킨 한 마리에 맥주 한 캔. 그 장면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나도 저렇게 먹고 싶다"는 감각을 심어놓았고, 그것이 실제 소비 행동으로 전환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불시착> 이후에도 비슷한 흐름이 반복되었습니다. 드라마 속 치맥 장면은 이미 K-드라마의 문법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고, 회식 자리와 스포츠 중계 화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하나의 문화 코드로 굳어졌습니다.
OED 등재, 그 의미
한 단어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오른다는 것은 단순한 유행어의 인증이 아닙니다. 특정 언어 공동체 바깥에서도 그 개념이 통용되고 있다는 언어학적 선언에 가깝습니다. 치맥이 OED에 실렸다는 사실은, 이 단어가 한국 식문화를 설명하는 전문 용어를 넘어서 영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실제로 쓰이는 어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OED가 등재 이유로 드라마를 직접 언급했다는 점은 더 흥미롭습니다. 음식 자체의 완성도가 아니라, 콘텐츠가 만들어낸 문화적 맥락이 먼저 전 세계 언어에 흡수된 셈입니다.
왜 한국 치킨인가 — 맛의 구조를 보면 보입니다
두 번 튀기는 이유
한국식 치킨의 핵심은 조리법에 있습니다. 닭을 두 번 튀기는 방식입니다. 첫 번째 튀김으로 속까지 익히고, 두 번째 튀김으로 겉을 바삭하게 마무리합니다. 이 방식이 만들어내는 식감을 한국에서는 '겉바속촉'이라고 부릅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뜻입니다.
미국식 치킨이 두꺼운 튀김옷으로 거칠고 묵직한 바삭함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한국식 치킨은 얇은 튀김옷으로 가볍고 경쾌한 바삭함을 냅니다. 육즙을 가두면서도 기름기를 줄이는 방식입니다. 틱톡에서 한국식 치킨을 먹어본 외국인이 "어떻게 튀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맛"이라고 했을 때, 그 감각의 정체는 이 두 번 튀기기가 만들어낸 식감의 차이였을 겁니다.
소스가 시장을 넓혔다
한국 치킨의 또 다른 강점은 소스의 다양성입니다. 고추장 기반의 양념치킨이 원형이라면, 간장치킨, 마늘치킨, 허니치킨으로 팔레트가 넓어졌고, 최근에는 마라 소스나 사워크림 같은 글로벌 트렌드를 반영한 메뉴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현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 확장성이 해외 시장에서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22개국 소비자 1만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 해외 한식 소비자 조사'에서 한국식 치킨은 한식 선호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14%의 응답률로 다른 한식 메뉴들을 제치고 올라선 수치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외에서 "한국 음식" 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비빔밥이나 불고기였습니다. 그 자리를 치킨이 바꿔놓았습니다.
브랜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 켜놓은 자리에서 보면, 문화 현상이 시장으로 전환되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릅니다. 드라마가 치맥의 인지도를 만들었다면, 그 인지도를 현실의 매장으로 연결한 것은 브랜드들의 현지 전략이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표한 '2025년 외식기업 해외 진출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외식기업들은 전 세계 56개국에서 4644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0년 3722개에서 약 25% 증가한 수치입니다. 그리고 해외 진출 업종 중 치킨 전문점의 비중이 가장 컸습니다.
BBQ는 현재 57개국에 700여 개 해외 매장을 운영하고 있고, 교촌은 7개국 80여 개, bhc는 7개국 30여 개 매장을 두고 있습니다.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외식업의 해외 진출이 아닙니다. 콘텐츠가 만들어준 관심을 브랜드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고 실제 사업 구조로 이어붙인 것입니다.
BBQ의 소셜 미디어 하소연이 바이럴이 된 이유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과의 만남 장소가 치킨집 '깐부치킨'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BBQ가 자사 스레드(Threads) 계정에 올린 글 한 줄이 인터넷을 달궜습니다. "백날 기획해서 올리면 뭐해. 젠슨 황이 안 오는데. 월요일 회의 들어갈 생각하니 벌써 힘들다." 해당 게시글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1500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았습니다.
이 글이 반응을 얻은 이유는 솔직함 때문만이 아닙니다. 브랜드가 아니라 사람이 쓴 것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BBQ 글로벌브랜딩전략실이 기획하고, MZ세대 언어 감각을 반영해 작성된 이 포스트는 마케팅 부서의 막내 캐릭터를 앞세워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치킨 브랜드가 글로벌 IT 회의와 한 화면에 들어온 것 자체가, 이미 치맥이 단순한 음식 카테고리를 넘어섰다는 증거입니다.
음식이 아니라 장면이 수출된다
기록을 오래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이 남습니다. 치맥이 OED에 실리고, 외국인 소비자 조사에서 한식 1위가 되고, 56개국 4644개 매장으로 번져나간 이 흐름의 출발점에는 드라마 한 장면을 보면서 "나도 저 자리에 있고 싶다"고 느꼈던 누군가가 있습니다.
한국 치킨이 두 번 튀기는 방식으로 바삭함을 구현한 것처럼, 치맥 문화도 두 번의 층위로 세계에 닿았습니다. 첫 번째는 콘텐츠가 만든 감정적 인지. 두 번째는 브랜드와 소스 전략이 만든 실제 경험. 그 두 층위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하나의 단어가 사전에 오르고, 하나의 음식 문화가 국경을 넘습니다.
다음에 비 오는 밤 맥주 한 캔 옆에 치킨 한 조각 뜯을 기회가 생기거든, 잠깐 그 장면의 무게를 생각해보셔도 좋습니다. 아주 먼 곳에 있는 누군가가 드라마 화면을 멈추고 그 장면을 다시 돌려보며 배워간 문화가, 지금 당신의 테이블 위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글: Sabina — 서울 거점, KStoryWorld Cultural Bridge Edi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