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이 꺼낸 서랍 — 1990년대 한국 첩보 서사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 첩보 이야기가 지금 다시 살아나는 이유

<<무빙>>이 공개됐을 때, 해외 시청자들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대개 이랬다.

"이게 그냥 슈퍼히어로물이야, 아니면 스파이 드라마야?"

둘 다라고 대답하면 맞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 한국에서 오랫동안 축적돼온 첩보 서사의 문법이 <<무빙>>이라는 그릇에 담긴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초능력자들의 액션이 화면을 채우는 동안, 그 아래에는 분단·냉전·국가 폭력이라는 한국적 역사의 층이 깔려 있다. 그 층을 모르면 <<무빙>>의 감정선 절반쯤은 그냥 지나치게 된다.

이 서사의 뿌리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전이 막 끝나고, 소련이 무너지고, 분단된 한반도는 새로운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마주하던 시절. 그 시기에 한국 문학과 영상 서사 속 첩보 이야기는 특별한 방식으로 자라났다.

1990년대라는 시간이 특별한 이유

소련 붕괴 직후, 한국 저널리즘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91년부터 1993년 사이, 중앙일보 기자 김국후는 구소련 전역을 직접 누비며 전직 소련군 장군들과 정보기관 간부들을 인터뷰하고, 소련 중앙 고문서 보관소에서 기밀문서를 발굴해 연재기사를 썼다. 관훈클럽 언론상을 포함해 여러 언론상을 잇달아 수상한 이 작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첩보 서사처럼 읽혔다.

냉전이 끝났다고 해서 정보가 갑자기 투명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비밀이 헐겁게 풀리면서 — 기자들이 직접 뛰어다녀야만 건져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픽션 작가들은 그 이야기들을 흡수했다. 현실이 이미 충분히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소설과 시나리오는 그것을 가공하는 방식만 달랐다.


역사가 서사 속으로 걸어 들어올 때

실존 인물, 숨겨진 파일, 그리고 무대

한국 첩보 서사의 또 다른 줄기는 역사 발굴에서 자라난다.

뮤지컬 <<스윙데이즈_암호명 A>>는 제약회사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OSS — 미국 CIA의 전신 — 가 비밀리에 추진한 냅코 프로젝트에 '암호명 A'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의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냅코 프로젝트는 1945년 8월 18일 작전 개시를 목표로 했고, 애국심 강한 한국인 19명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작전은 끝내 실행되지 못했다.

완수되지 못한 작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진 이름. 이것이 뮤지컬의 출발점이었다.

<<스윙데이즈_암호명 A>>의 대본을 쓴 건 작가 김희재다. 2003년 한국 영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넘긴 <<실미도>>의 시나리오를 썼던 바로 그 작가.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이후 <<공공의 적 2>>, <<한반도>> 등을 거치며 국가 권력과 개인의 충돌을 다루는 서사에 일관되게 손을 뻗어왔다. 뮤지컬은 그에게 첫 도전이었다. 100억 원의 제작비와 3년의 준비 기간이 걸렸다.

첩보 서사가 영화에서 뮤지컬로 형식을 바꿔도 — 핵심은 같다. 국가라는 거대한 힘과, 그 안에서 자신의 선택을 감당해야 하는 개인. 유일한 박사가 "암호명 A"로 불리며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움직였던 그 긴장감은, <<무빙>>의 아버지들이 초능력을 숨긴 채 평범한 삶을 유지하려 했던 긴장감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위장과 생존 사이

외국 독자들이 한국 첩보 드라마 앞에서 자주 멈칫하는 지점이 있다. 스파이가 왜 이렇게 감정적이냐는 것이다. 임무 완수보다 가족을 더 오래 생각하고, 적국의 언어로 살아가면서도 그 언어가 무기가 아니라 상처가 된다.

서구의 첩보물 문법에 익숙한 시청자에게, 한국 스파이는 종종 "너무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한국 첩보 서사가 쌓아온 고유한 결이다.

곧 공개될 드라마 <<코리언즈>>는 이 결을 정면으로 들고 나온다.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한 미국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되, 배경을 1990년대 서울의 중산층 아파트 단지로 옮겼다. 정체를 숨긴 채 한국 사회에 정착한 북한 스파이 부부와 이들을 추적하는 형사의 심리전. 이병헌이 한국에 잠입해 10년 넘게 살아온 엘리트 북한 스파이 김명준을 맡고, 한지민이 그의 위장 아내이자 동료 공작원 윤화경을 연기한다.

원작이 냉전 시대 미국에 잠입한 소련 스파이 부부의 이야기라면, <<코리언즈>>는 그 구조를 남북 분단이라는 훨씬 더 가까운 현실 위에 얹는다. <<더 글로리>>와 <<비밀의 숲>>을 연출한 안길호 감독, 영화 <<마더>>와 <<보통의 가족>>의 박은교 작가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품이 단순한 장르물에 머물지 않을 거라는 예감은 충분하다.


<<무빙>>이 열어놓은 문

슈퍼히어로가 아닌 부모로 읽을 때

<<무빙>>의 1세대 — 그러니까 초능력을 가진 부모들의 이야기는 사실상 1990년대 한국 국가 권력의 초상화다. 국정원의 전신 격 기관이 등장하고, 개인은 능력을 가진 순간부터 국가의 자산으로 간주된다. 숨는다는 것, 아이에게 비밀을 유지한다는 것, 평범한 삶을 흉내 낸다는 것 — 이 모든 행동이 전형적인 첩보 서사의 요소다.

외국 시청자에게 <<무빙>>을 소개할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 드라마는 "슈퍼히어로물"이 아니라 "초능력자를 국가가 어떻게 소비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그 프레임으로 보면, <<무빙>>은 <<코리언즈>>나 <<스윙데이즈_암호명 A>>와 같은 계보 위에 선다.

국가는 개인의 특별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특별함을 보호하지는 않는다. 한국 첩보 서사가 반복해서 건드리는 이 균열이, <<무빙>>에서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거리로 치환된다.

직역이 막히는 단어들

외국 독자가 한국 첩보 콘텐츠를 따라가다 멈칫하는 단어들이 있다.

안기부. 직역하면 "국가안전기획부"지만, 감정 번역은 이렇다 — "당신의 전화를 듣고 있을 수도 있는 기관" 혹은 "1990년대 한국인이 이름 꺼내기 조심스러워했던 곳." 지금의 국정원 전신이지만, 그 시절의 무게는 다르다.

공작원. "operative" 혹은 "agent"로 번역되지만, 한국어에서 이 단어는 단순한 직업 명칭이 아니다. 정체를 숨긴 채 임무를 수행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의 본명으로 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빙>>의 부모들, <<코리언즈>>의 북한 스파이 부부, <<스윙데이즈_암호명 A>>의 유일한 박사 — 모두 이 단어 안에 있다.


이 계보를 읽는 하나의 방법

Sabina's Perspective

홍콩에 살던 시절, 나는 한국 영화를 자주 챙겨봤다. 그때는 한국 첩보물의 감정선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분단이라는 현실이 내 일상과 닿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로 거점을 옮기고, 이 도시를 더 오래 들여다보면서 — 비로소 그 무게가 무엇인지 감이 왔다. 한국 첩보 서사에서 스파이가 "너무 인간적"인 건 실수가 아니다. 분단을 살아온 사회에서 정체를 숨긴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적 선택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가깝다. <<무빙>>의 아버지가 딸 앞에서 오래 침묵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그 침묵의 무게를 제대로 느꼈다. 한국 드라마가 침묵으로 감정을 쌓아 올리는 방식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침묵을 다룬 글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감각이 있어야, <<코리언즈>>의 북한 스파이 부부가 중산층 아파트에서 밥을 먹는 장면도 — 그냥 식사 장면이 아니라 위장의 긴장으로 읽힌다.

1990년대 한국 첩보 서사는 단순히 장르를 채운 게 아니었다. 분단된 사회가 자신의 불안을 서사로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무빙>>이 그 서랍을 다시 열었고, <<코리언즈>>와 <<스윙데이즈_암호명 A>>가 그 안의 이야기를 꺼내 새로운 형식에 담고 있다.

외국 독자에게, 이 계보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꽤 다른 경험이 된다. 적어도 그 차이를 한 번쯤 느껴보시길. <<무빙>>의 장면들을 음악으로 다시 걷고 싶다면 <<무빙>> 삽입곡 플레이리스트도 함께 읽어보자.


글: Sabina — 서울 거점, KStoryWorld Cultural Bridge Editor

이미지: Schlagwortkatalog by Dr. Marcus Gossler · CC BY-SA 3.0 ·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