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y Serenade: 집착과 사랑 사이, 그 경계를 노래하는 K-Pop

그날 밤, 잔이 비워질 때쯤 들었던 노래

가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 장면에서는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죠. 음악이 장면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장면이 음악을 불러낸다는 것. <<더 글로리>>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감각 — 복수인지 사랑인지 분간이 안 되는 집착, 그 묘한 경계감 — 이 최근 들은 K-Pop 몇 곡에서 다시 만져졌습니다.

NMIXX의 다섯 번째 미니 앨범 <>가 그 입구가 됐습니다. 2025년 10월 <> 이후 약 7개월 만에 JYP 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 NMIXX가 꺼내든 이 앨범은, 타이틀곡과 앨범 이름이 같다는 점부터 의도가 명확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제목으로 걸었다는 건, 그 소리에 꽤 확신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외국 독자들이 K-Pop을 처음 접할 때 가장 어려워하는 게 있어요. "이게 왜 좋은 건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 기술적으로는 알겠는데, 왜 이 곡이 이 감정에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 오늘은 그 지점에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가 만들어낸 것

한로로의 가사, 그리고 NMIXX의 보컬이 만나는 방식

<>의 작사는 싱어송라이터 한로로가 맡았습니다. ESUM, Ayushy(THE HUB), Awrii(THE HUB), Maribelle Anes, Josefin Glenmark, 설아(SEORA), SSo가 곡을 함께 만들었고, 편곡은 ESUM이 담당했습니다.

한로로는 독립 음악 씬에서 감성적인 가사로 이미 알려진 이름입니다. 그가 쓴 가사의 특징은 감정을 직접 선언하지 않는다는 것. 빙 돌아가는 듯 하면서 결국 핵심을 건드리는 방식. <>에서도 그 결이 살아 있습니다. 확신에 찬 깊은 사랑, 그런데 그 확신이 상대를 향한 것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경계가 흐릿한 지점.

NMIXX의 여섯 멤버들 — 해원, 릴리, 설윤, 배이, 지우, 규진 — 의 보컬은 그 모호한 가사를 오히려 더 또렷하게 만들어줍니다. 특히 릴리의 보컬은 이 곡에서 중심축으로 기능합니다. 파워풀한 고음에서 에너지를 쏟아내고, 감성적인 부분에서는 곡의 공기를 섬세하게 조절합니다. 라이브 중심으로 평가받는 그룹에서 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무대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곡의 구조도 재밌습니다. 초반에는 몽환적이고 잔잔하게 시작해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쌓이다가 마지막 후렴에서 한꺼번에 터집니다. 듣는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OST 같은 웅장함"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 곡 안에서 여러 감정의 층이 겹쳐지는 구성. 이어폰을 끼고 크게 들었을 때 더 매력적인 이유도 그 레이어 때문입니다.

릴리의 작사 참여,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서

<> 앨범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멤버 릴리가 작사에 직접 참여한 트랙입니다. 팬들 반응이 유독 뜨거웠는데, "가사가 진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느낌", "릴리에게 이 곡을 맡긴 건 진짜 선택이다"라는 말들이 댓글창에 줄을 이었습니다.

호주 출신 보컬리스트가 한국어로 쓴 가사, 그것도 감정의 과잉을 절제하면서 써낸 가사. 이게 왜 의미 있냐면, K-Pop 아이돌의 작사 참여는 자주 '참여'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곡과 가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노래를 듣고 작사를 한 건지, 작사를 하고 노래를 받은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 그 증거입니다.


<<더 글로리>>의 감정선과 이 음악들이 만나는 지점

불 켜놓은 자리에서 보면, <<더 글로리>>는 복수극이 아닙니다. 집착극입니다. 문동은이 18년을 버틴 힘은 분노보다 오히려 확신에 가까웠고, 그 확신은 사랑과 구분하기 어려운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어떤 감정이든 그 밀도가 충분히 높아지면 결국 같은 온도가 된다는 것.

<>가 그 드라마의 배경음악이 됐을 때 어색하지 않은 건 그 때문입니다. '확신에 찬 깊은 사랑'이라는 표현이 어떤 장면에는 아름답고, 어떤 장면에는 무섭습니다. 그리고 K-Pop의 가장 세련된 순간들은 그 두 감정을 동시에 담습니다.

외국 독자들이 한국 드라마에서 종종 묻는 것이 있어요. 왜 한국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무겁냐고. 가볍게 좋아하고 가볍게 헤어지면 안 되냐고. 그 질문에 짧게 답하면, 한국의 대중문화는 오랫동안 감정의 밀도를 미덕으로 여겨왔습니다. 덜 느끼는 것보다 과하게 느끼는 것이 더 진짜처럼 보이는 문법. <>는 그 문법을 팝 형식으로 가장 정교하게 담아낸 최근의 사례 중 하나입니다.


K-Pop이 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

대비의 미학 — DAVINK와 Kei의 조합

이 맥락에서 같이 들으면 흥미로운 곡이 있습니다. DAVINK와 Kei가 함께한 트랙. 두 사람의 보컬 대비는 <>와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DAVINK의 투박하고 날 선 보컬과 Kei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번갈아 나오면서 생기는 그 묘한 마찰감 — 사랑과 증오가 같은 주파수에 있다는 것을 소리로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팬들이 "진짜 미친 조합"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단순히 목소리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질감이 충돌하면서 오히려 곡의 긴장감이 완성되는 구조.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과 박연진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너무 달랐기 때문에 서로를 놓지 못하는 구조.

이하이 <<2 EASY>>의 시선

또 하나 이 흐름에 자연스럽게 놓이는 곡이 808 HI RECORDINGS 소속 이하이의 <<2 EASY>>입니다. 2025년 5월 공개된 이 곡은 감정을 너무 쉽게 소비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을 다루고 있습니다. 앨범 제목이 <<2 EASY 2 BE HON2ST>>인데, 이미 제목에서 정직하기가 너무 쉬운 척한다는 아이러니가 깔려 있어요.

이하이의 목소리는 원래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느끼게' 만드는 타입입니다. <<2 EASY>>에서도 그 결은 유지됩니다. <>가 집착의 온도를 높인다면, 이 곡은 그 온도를 내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같이 들으면 한국 대중음악이 지금 어떤 감정의 스펙트럼 안에 있는지 조금 보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의 감각

K-Pop의 차트 데이터도, 스트리밍 숫자도 결국 누군가가 어떤 감정을 필요로 했다는 증거입니다. <>가 이번 봄을 장식할 필청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말은, 이 계절에 이 밀도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NMIXX는 <>로 그 존재감을 굳혔습니다. 데뷔 초 강한 퍼포먼스와 실험적인 음악 스타일로 주목받았던 그룹이, 이제는 자기 색깔로 사람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단계에 왔습니다. 색깔을 찾는 것과 그 색깔을 유지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는 후자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더 글로리>>가 오래 남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복수의 서사를 빌렸지만, 결국은 어떤 감정에 18년을 건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요. K-Pop에서도 그 밀도가 느껴질 때, 음악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그 장면 자체가 됩니다.


글: Jacky — 제주·서울, KStoryWorld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