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제병원은 진짜 있다 — 이대서울병원과 보구녀관을 직접 걸어본 날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고 나면 묘하게 병원이 달라 보인다. 응급실 복도, 의사들이 밥 먹는 구내식당, 수술 후 잠깐 숨 고르는 계단참까지.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저 병원, 실제로 있는 건가?" 하고 찾아봤다면, 당신은 이미 반쯤 여기 와 있는 거다.
율제병원의 실제 주소는 서울 강서구, 이대서울병원이다. 2019년에 문을 연 이 병원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물론 <<의사요한>>, <<중증외상센터>>까지 여러 의학 드라마의 배경이 됐다는 사실은 팬들 사이에선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촬영지"라는 단어 하나로만 설명하기엔 이 공간이 훨씬 복잡하고 묘하다는 걸 알게 된다.
드라마 속 율제병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었나
의대 동기 5명의 하루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의학 드라마치고는 사건이 거의 없다. 주인공 다섯 명 — 조정석, 유연석, 정경호, 김대명, 전미도 — 은 모두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대 동기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 대형 사고나 의료 비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이 다섯 명이 수술하고 밥 먹고 연습하고 고민하는 하루하루다.
전미도가 연기한 채송화는 신경외과 교수인데, 드라마에서 실력과 인성을 동시에 갖춘 캐릭터로 그려진다. 눈에 띄는 장면은 수술실보다 오히려 친구들끼리 밴드 연습하는 장면이 더 많았다. 의사들이 퇴근 후 악기를 들고 모이는 그 장면이 드라마의 상징처럼 됐다. "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반응이 많았던 건 그 때문이다.
그 장면이 찍힌 곳
이대서울병원은 로비가 넓다. 단순히 큰 게 아니라, 층마다 그림과 조형물이 전시돼 있어서 걷다 보면 미술관처럼 느껴지는 구간이 있다. 건물 사이에 작은 정원도 조성돼 있다. 병원에서 이런 공간을 만나면 처음엔 좀 어색하다. "여기 병원 맞나?" 싶은 그 감각.
드라마를 봤다면 알겠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율제병원은 그렇게 과하게 극적이지 않은 공간이었다. 복도가 길고, 빛이 들어오는 창이 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 평범한 동선. 실제 이대서울병원을 걸어보면 그 감각이 겹친다.
이대서울병원, 드라마 밖에서 보면
보구녀관이라는 존재
현대식 병원 건물 사이에 한옥 한 채가 있다. 보구녀관이다.
188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으로, 이화여대 의료원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 건물이 지금의 이대서울병원 부지 안에 이전·복원돼 있다. 처음 보면 살짝 낯설다.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기와지붕이 있는 게. 그런데 그 낯섦이 잠시 지나면, 오히려 이 병원이 왜 이런 공간을 만들어뒀는지 이해가 된다.
보구녀관 안에 들어가면 배우들의 사인이 담긴 <<슬기로운 의사생활>> 포스터가 있다. 촬영지라는 건 알고 갔는데, 실제로 사인을 보는 순간은 좀 달랐다는 반응이 많다. 드라마 장면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긴장했던 마음이 잠깐 풀리는 그런 순간.
병원에 가는 사람은 대부분 마음이 무겁다. 환자 본인이거나, 누군가를 걱정하러 온 가족이거나. 그 공간에서 드라마 포스터를 보고 잠깐 미소를 짓는다는 게, 사실 꽤 드문 경험이다.
드라마 세트가 아닌 진짜 병원
이대서울병원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지어진 공간이 아니다.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이다.
이 병원은 개원 이후 혈관 질환 치료에 집중해왔다. 2023년에는 이대뇌혈관병원과 이대대동맥혈관병원을 차례로 열었고, 고위험 산모와 신생아를 위한 이대엄마아기병원도 운영 중이다. 국내 대동맥 응급 수술 분야에서는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수술 준비를 마치고 도착 즉시 수술실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전남에서 올라오거나, 오송에서 출산하러 오거나, 타 지역 환자들이 장거리를 이동해 이 병원을 찾는 이유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국내 대학병원 최초로 기준 병실을 3인실로 설계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모든 중환자실은 1인실로 운영된다. 의료 시설과 의료진 수준은 상급종합병원에 준하지만 진료비는 상대적으로 낮고 대기 시간도 짧다. 그러니까 드라마 팬이 아닌 사람에게도, 이 병원은 이유 있는 선택지다.
촬영지 순례, 어떻게 접근할까
팬의 시선과 방문자의 예의
이런 곳을 "성지순례" 식으로 소개하는 글들이 많은데,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이대서울병원은 현재도 운영 중인 의료시설이다. 드라마 팬이라면 당연히 가고 싶겠지만, 그 안에서 큰 소리로 사진 찍거나 의료진 동선을 방해하는 건 다른 문제다.
로비와 보구녀관은 일반 방문객도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천천히 걷고, 보구녀관에 들어가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드라마를 봤다면 그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테고, 안 봤어도 이 공간 자체로 볼 게 있다.
발산역에서 연결 통로로 바로 이어진다. 차 없이도 접근하기 편하다는 점은 외국인 방문자에게 특히 중요하다. 병원 근처에 편의시설도 충분히 갖춰져 있다.
보구녀관을 놓치지 말 것
외국인 방문자가 이 병원을 찾는다면, 보구녀관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공간이다. 드라마 배경이라는 정보 없이 오면 더더욱. 그런데 현대식 건물 사이에 한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한옥이 130년 넘은 역사를 가진 여성 의료기관의 흔적이라는 것 — 이걸 알고 들어가는 것과 모르고 들어가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본 사람이라면 보구녀관 안에서 포스터를 발견하는 순간이 반갑겠지만,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공간이 가진 역사적인 층위는 충분히 흥미롭다. 조선 말기에 여성 전용 병원이 생겼다는 것, 그 병원이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졌다는 것.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병원이라는 공간을 무섭거나 극적인 곳으로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일하고, 먹고, 실수하고, 위로받는 공간으로 보여줬다. 이대서울병원을 실제로 걸어보면 그 감각이 어디서 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드라마가 그 공간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글: Jacky — 제주·서울, KStoryWorld 운영자
사진: S h y numis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