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이 여행지가 될 때: <<더 글로리>>의 무채색 팔레트와 인천·서울의 도시 풍경

드라마가 먼저, 도시가 나중

처음 인천 어느 골목에 섰을 때, 낯선 감각이 먼저 왔습니다. 화려하지 않다는 것. 서울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공기 질감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항구 도시 특유의 습기, 벽면을 타고 내려온 빗물 자국,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오래된 것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위기. <<더 글로리>>를 다시 떠올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더 글로리>>는 2022년 말부터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입니다. 복수, 계급, 폭력의 구조를 다루는 작품인데, 비주얼적으로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색을 죽입니다. 채도를 낮추고, 대비를 줄이고, 도시를 회색에 가까운 톤으로 가둬놓습니다. 그 결과 인천의 골목과 서울의 특정 지역이 배경으로 등장할 때, 드라마틱하게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어딘가 무거운 현실 속 도시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게 맞습니다. 그게 실제입니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한국에 와서 종종 당황하는 것 중 하나가 있습니다. K-드라마에서 본 도시의 빛나는 이미지와 실제 거리의 온도 차이. 홍대 골목이나 강남 대로변은 유튜브에서 본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예상과 다른 풍경이 나옵니다. 콘크리트 외벽, 낡은 슈퍼마켓 간판, 좁은 계단, 지하 식당 입구의 형광등. 그게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글로리>>가 잡아낸 것이 바로 그 층위의 도시입니다.

드라마의 색감이 곧 도시의 기억

인천이라는 도시, 무채색이 자연스러운 이유

인천은 서울과 다른 결을 가진 도시입니다. 수도권이라는 이름 아래 묶이지만, 사실 인천은 훨씬 오래된 레이어가 쌓인 곳입니다. 개항 시대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는 개항로, 화교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차이나타운, 60~70년대 산업화 시절의 흔적이 남은 부평 구도심. 이 도시는 세련되기 전에 먼저 낡은 곳입니다.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이 살아온 환경의 회색 톤은, 그냥 연출 선택이 아닙니다. 그게 인천 구도심 지역에서 실제로 느껴지는 색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오래된 다가구 주택의 시멘트 벽, 복개천 위에 만들어진 도로, 버스 종점 근처의 빛바랜 간판들. 드라마가 배경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배경이 드라마의 어조를 만들어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행자로서 인천에 간다면, 보통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면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알 것입니다. 하지만 인천 구도심을 따로 반나절이라도 걸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개항로 일대는 지금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서며 천천히 변하고 있지만, 두 블록만 벗어나면 아직도 <<더 글로리>> 속 색감이 살아 있는 골목들이 있습니다.

서울의 또 다른 얼굴, 드라마가 비추지 않는 쪽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인들이 보통 기대하는 서울은 강남구, 마포구 홍대 일대, 성수동의 감각적인 공간들입니다. 하지만 <<더 글로리>>의 서울은 그 옆 동네, 혹은 그 뒷골목입니다.

노원구, 중랑구, 구로구, 금천구. 서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어느 여행 가이드북에도 잘 나오지 않는 지역들입니다. 이 동네들의 공통점은, 오래된 아파트 단지와 재래시장과 낡은 상가 건물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이 서울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주인공의 삶이 그런 공간에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오래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외국인 손님들 중에 한국을 두 번, 세 번 오는 사람들은 두 번째쯤 되면 그 뒷골목에 대해 물어봅니다. 처음엔 명동, 이태원, 경복궁을 봤다면, 두 번째엔 "진짜 동네 같은 곳"을 찾습니다. <<더 글로리>>는 그 욕구에 대한 하나의 주소가 될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어디 가면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냐고 물어보면, 저는 인천 개항로나 서울 망우동 쪽 골목을 권하는 편입니다.

회색 팔레트를 걷는 여행법

눈이 아니라 발로 읽는 도시

드라마 속 색감을 실제 여행에서 느끼려면,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명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간대와 특정 조건이 필요합니다.

흐린 날 오전의 인천 개항로를 걸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관광지처럼 꾸며진 신포동 지도 아닌, 거기서 조금 더 안쪽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슈퍼마켓 옆 공터, 담벼락에 반쯤 지워진 낡은 포스터, 전봇대에 감긴 케이블들. 이것들이 <<더 글로리>>의 색입니다. 채도를 낮추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화려한 색감이 없어지면 형태와 질감이 드러납니다.

서울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려면 지하철 1호선 구간이 유용합니다. 청량리에서 수원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역마다 시대가 다릅니다. 1980년대 개발의 흔적, 2000년대 재건축의 반쪽, 아직 남아있는 단독주택 골목들. 여기서 내려 한 시간을 걸으면 서울 안에서 드라마가 선택한 공간의 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촬영지보다 분위기, 지도보다 계절

<<더 글로리>> 팬들 중 촬영지를 찾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만큼은 특정 건물을 찾아가는 것보다 분위기 전체를 읽는 여행이 더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드라마의 색감은 장소보다 계절과 날씨에서 나오는 부분이 큽니다. 흐린 가을, 바람이 부는 겨울 초입, 비 오는 다음 날 오전. 이 조건들이 갖춰질 때 인천과 서울의 어느 골목이든 <<더 글로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한국 여행 계획을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로 잡는 분들이 많습니다. 단풍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서울과 인천은 채도가 낮아집니다. 잎사귀가 다 지고 나면, 도시가 가진 콘크리트와 철골과 회색 벽이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그 안에서 걷는 경험은 어떤 여행 가이드에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불 켜놓은 자리에서 보면, 화려한 경관보다 오히려 이런 도시의 결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여러 사람들의 여행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장 선명하게 남는 장면은 대체로 가이드북에 없는 골목에서 나옵니다.

회색이 전달하는 것들

드라마가 선택한 무채색 팔레트는 미적 결정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발언입니다. <<더 글로리>>는 한국 사회 내 계급과 폭력 구조를 이야기하는데, 그 무대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 방식으로 이미 방향을 정했습니다. 가해자들이 사는 세계는 밝고 높고 넓고, 피해자의 세계는 낮고 좁고 회색입니다. 드라마는 그 대비를 직접 말하기보다 화면 전체의 톤으로 말합니다.

여행자로서 이 드라마를 보고 한국에 온다면, 그 회색이 낙후된 것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인천 구도심이 낡은 게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쌓인 것이고, 서울 외곽의 동네들이 별 볼 일 없는 게 아니라 도시가 성장한 궤적 그 자체입니다.

<<더 글로리>>는 회색 배경 안에서 사람들이 살고 버티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도시를 직접 걸으면, 드라마가 왜 그 색을 선택했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한국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 중 <<더 글로리>>를 본 분이라면, 인천 개항로를 흐린 날 오전에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신포시장 옆 골목, 차이나타운을 지나 조금 더 안쪽,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벽과 계단과 낡은 창문들. 드라마가 고른 건 그 풍경이었고, 그 풍경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화려한 여행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강남이나 성수동을 권합니다. 하지만 드라마가 보여준 층위의 한국을 느끼고 싶다면, 회색 골목에서 반나절을 보내는 것이 어떤 전시나 루프탑보다 오래 남을 것입니다.


글: Jacky — 제주·서울, KStoryWorld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