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빙>>이 보여준 한강, 직접 걸어봤다
한강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늘 있어왔다. 그런데 <<무빙>>을 보고 나서 한강 쪽으로 가고 싶어졌다는 사람들은 이유가 조금 다르다. 초능력자들이 하늘을 나는 슈퍼히어로물인데, 정작 기억에 남는 건 골목과 편의점, 강가 동네의 공기라서다. 그 동네가 실제로 어디인지 궁금해서 직접 가봤다.
미리 말해두면 이 글은 절반쯤 정정 기사이기도 하다. 걷다 보니 알게 됐다. <<무빙>>이 보여준 건 한강이라는 강물 그 자체라기보다, 한강 동쪽 끝에 붙어 있는 동네였다. 강을 정면으로 담은 드라마는 따로 있었다. 같은 디즈니+의 <<한강>>이다. 이 두 작품을 겹쳐 놓고 걸으면 서울에서 꽤 괜찮은 한국 여행 코스가 하나 나온다. 그 순서대로 적는다.
드라마가 여행 안내자가 되는 나라
한국에서는 드라마가 여행 안내자 역할을 한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윤세리와 리정혁이 소풍을 즐긴 충주 비내섬,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초이가 고애신에게 마음을 전한 안동 만휴정처럼, 명장면 속 장소를 찾는 발걸음은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계속된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요즘 드라마들은 유명 명소보다 한국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동네를 배경 삼고, 실제 지명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목록은 길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전주 서학동예술마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창원 동부마을. 아예 매회 다른 도시를 여행하는 <<박하경 여행기>> 같은 작품은 해남, 군산, 부산, 속초, 대전, 서울, 경주, 제주를 차례로 걸었다. 드라마가 안내하는 곳만 따라가도 한국 방방곡곡 구경 잘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무빙>>이 정확히 그런 경우다. 화려한 랜드마크가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장 보고 학교 다니고 퇴근하는 동네가 무대다. 그리고 그 동네는 이름부터 강과 붙어 있다. 강동(江東), 한강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무빙의 무대는 강 위가 아니라 강동이다
<<무빙>>의 주요 배경은 강동구로 설정되어 있다. 장주원(류승룡)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살고 일하는 곳, 김봉석(이정하) 같은 아이들의 학교까지 전부 강동구라는 설정이다. 2023년 8월 공개 직후부터 강동구가 새로운 드라마 성지로 떠오른 이유다. 이 드라마가 왜 한국 슈퍼히어로물의 기준을 바꿨는지는 별도의 글에서 자세히 다뤘으니, 여기서는 공간 이야기에 집중한다.
웹툰 작가 강풀의 동네
<<무빙>>의 원작자이자 직접 각본을 쓴 웹툰 작가 강풀은 <<순정만화>>, <<바보>>, <<27년>> 등 거의 모든 작품에서 강동구를 배경으로 삼아왔다. 그는 드라마 공개 무렵의 인터뷰에서 "배경을 만들 때 실제 장소를 찾아서 반영하는데, 3살 때부터 강동구에서 살아서 내가 사는 동네를 담았다"고 말했다. 강동구에서 자라며 쌓은 기억이 작품의 소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빙>>의 강동구는 세트처럼 꾸며진 공간이 아니다. 작가가 실제로 알고 있는 골목과 아파트와 편의점이 그대로 들어간 동네다. 봉석이가 드나들었을 법한 편의점 진열대가 궁금하다면 한국 편의점에서 10대가 실제로 손 뻗는 것들을 같이 읽어도 좋다.
강풀만화거리 걷기
강동구청은 2013년부터 성내동 일대에 강풀만화거리를 조성해 왔다. 골목 담벼락에 강풀 작품의 장면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 길이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도슨트 투어도 다시 열렸고, 구청에 따르면 <<무빙>> 이후 타 지역 방문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직접 걸어보면 이 거리의 매력은 벽화 자체보다 벽화와 골목의 관계에 있다. 만화 속 장면이 그려진 담장 너머로 실제 빨래가 널려 있고, 벽화 옆 슈퍼에서 실제 주민이 물건을 산다. 관광지라기보다 남의 동네에 잠시 초대받은 기분이 드는 길이다. 강풀 작품이 늘 해왔던 일, 그러니까 평범한 동네에 비범한 이야기를 얹는 일이 골목 단위로 재현되어 있는 셈이다.
드라마 성지로서의 강동구 — 쌍문동의 경우처럼
실제 주민이 사는 동네가 드라마 성지가 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응답하라 1988>>과 <<오징어 게임>>으로 익숙해진 도봉구 쌍문동이 대표적이다. <<무빙>> 이후의 강동구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있다.
다만 이런 동네의 성지 순례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화려한 포토존이 있는 곳이 아니다. 주민들의 생활 공간이기 때문에 조용히 걷고, 가게가 보이면 들어가서 뭔가 사 먹는 방식이 맞다. 드라마에서 봤던 골목이 "저기다" 싶으면 그냥 천천히 지나가는 거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강동구에서 한강을 만나는 법 — 광나루한강공원
강동구까지 갔다면 강을 안 보고 돌아올 이유가 없다. 서울의 한강공원 여러 지구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곳이 광나루한강공원이다. 여의도나 반포처럼 편의시설이 빽빽한 곳이 아니라, 갈대와 흙길과 자전거 도로가 대부분인 조용한 구간이다. 근처의 암사생태공원까지 이어 걸으면 서울 한복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한적하다.
<<무빙>>이 한강 수면을 오래 비추는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인물들이 살아가는 생활권의 강이 어떤 얼굴인지 궁금하다면 답은 여기에 있다. 관광지의 강이 아니라 동네의 강. 퇴근길에 지나치고, 주말에 자전거를 타는 강이다.
실제로 걸어보면 이 구간의 소리가 다르다. 여의도처럼 스피커 음악이나 푸드트럭 소음이 없고, 자전거 체인 소리와 갈대 스치는 소리가 대부분이다. 평일 낮에는 마주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라서, 드라마 속 인물들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초능력을 숨기며 살아가는 동네라는 설정이 이상하게 설득력을 얻는다. 걸어서 강을 건너보고 싶다면 광진교를 추천한다. 차도 옆으로 보행로가 넉넉하게 나 있어서, 다리 위에서 강 동쪽의 스카이라인을 천천히 눈에 담을 수 있다.
<<무빙>>의 장면들을 음악과 함께 되짚으며 걷고 싶다면 삽입곡 플레이리스트를 이어폰에 넣고 가는 것도 방법이다.
강 자체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따로 있다 — <<한강>>
이제 정정할 차례다. "형사들이 강변에서 쓰레기를 줍고 바지선 위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 때문에 한강에 가보고 싶어졌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장면의 출처는 <<무빙>>이 아니다. <<무빙>> 직후 디즈니+가 선보인 6부작 시리즈 <<한강>>이다. 한강경찰대가 강을 둘러싼 범죄에 휘말리는 이야기로, 망원지구대의 한두진(권상우)과 이춘석(김희원)이 주역이다. 두 작품 모두 한강 언저리를 다루다 보니 기억 속에서 자주 섞이는데, 걷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다. 코스가 두 배가 되니까.
<<한강>>을 기획한 필름몬스터 김용기 대표는 우연히 한강경찰대의 구조 현장을 목격한 뒤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한강이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역동적인 공간처럼 느껴졌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강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내나 특수 효과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한강 관련 장면은 100% 한강에서 촬영했다"고 했다. 세트나 합성이 아니라 실제 강이라는 뜻이다. 외국 시청자 입장에서 "저 다리가 진짜 다리야?" 하고 의아할 수 있는데, 그게 다 진짜다.
극 중에서는 유람선이 좌초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수면 위에서 제트스키 추격전이 펼쳐진다. 권상우는 공개 당시 인터뷰에서 수중 촬영이 물속 호흡 시간이 정해진 미션 같았다고, 그래서 한 장면을 끝내고 물 밖으로 나올 때의 통쾌함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배우가 실제로 강물에 들어가서 만든 장면들이라는 얘기다.
강서습지생태공원 — 형사들이 쓰레기를 줍던 그 풀밭
한두진과 이춘석이 벌칙처럼 쓰레기를 줍던 곳은 강서습지생태공원이다. 서울 서쪽 끝 강변에 있는 이 공원은 한강 유역의 습지를 보존하는 공간인데, 평소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강공원 중에서도 개발이 덜 된 편이고, 풀이 우거진 자연 습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드라마 속 장면처럼 황량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실제로 느껴진다.
이 공원을 찾는 외국인 여행자는 거의 없다. 애초에 서울 시민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고, 여의도나 반포처럼 편의시설이 갖춰진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만큼 한강의 날 것 같은 면을 볼 수 있다. 드라마 속 형사들이 황량한 강변에서 라면을 먹던 정서, 실제로 서 있으면 이해가 된다. 인스타그램용 공원이 아니라 그냥 강변이다.
난지 바지선 — 라면 한 냄비의 장소
라면 장면은 난지 공원 인근, 바지선들이 모여 있는 수면 위에서 촬영됐다. 바지선이라는 게 화물을 싣는 평평한 배인데, 한강에서는 이 배들이 강변에 정박해 있는 풍경이 꽤 익숙하다. 외국 시청자들에게는 낯설 수 있는 장면이다. 요트나 유람선이 아니라, 낡은 철제 바지선 위에서 국물 냄새 풍기며 라면 먹는 장면. 그게 오히려 현실적인 한강의 모습에 가깝다.
난지 공원은 서울 마포구에 있고, 예전에 쓰레기 매립지였던 땅이 공원으로 바뀐 곳이다. 지금은 캠핑장으로도 인기가 많고, 한강 조망도 꽤 좋다. 바지선을 직접 탈 수는 없지만, 강변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드라마 속 장면을 머릿속에 맞춰볼 수 있다.
한강 콘텐츠 산책은 여의도에서 마무리
여의도 한강공원의 <<괴물>> 조형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는 한강공원 일대가 괴물의 서식지로 등장했다. 그걸 기념하는 조형물이 여의도 한강공원 안에 설치되어 있다. 낮에는 산책하다 마주치고, 밤에는 서울 야경과 한강 불빛 사이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한강을 무대로 삼은 한국 영상물의 계보에서 가장 오래된 어른 같은 존재다.
여의도 구간은 접근성이 좋고 편의시설도 충분해서, 강서습지나 광나루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참고로 여의도 하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로펌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 거리의 실제 위치에 대해서는 따로 걸어본 기록이 있다.
유람선, 그리고 동서 횡단 자전거길
<<한강>>에서 사건의 무대가 되는 한강 유람선은 여의도 선착장에서 실제로 탈 수 있다. 드라마처럼 긴박한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강 위에서 서울을 바라보는 경험은 꽤 다르다. 강변에서 보는 서울과 강 위에서 보는 서울이 전혀 다른 도시처럼 느껴진다.
한강 자전거길은 서울을 동서로 가로질러 연결된다. 동쪽 끝 광나루에서 출발해 잠실, 뚝섬, 여의도를 지나 난지와 강서습지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무빙>>의 동네에서 출발해 <<한강>>의 로케이션에서 끝나는 코스가 실제 지리 위에 한 줄로 그려진다는 뜻이다. 하루에 다 걷기는 무리고, 자전거로는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구간마다 강변의 표정이 달라지는 걸 몸으로 확인하게 된다.
일정을 짠다면 이런 식이 된다. 오전에 강동구 골목과 강풀만화거리를 걷고, 광나루한강공원에서 강바람을 쐬며 쉰다. 오후에 자전거를 빌려 서쪽으로 달리다가 여의도에서 괴물 조형물을 만나고, 해 질 무렵 유람선이나 강변 벤치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코스다. 체력이 남는다면 다음 날 강서습지생태공원까지 이어가면 된다. 이틀이면 두 드라마의 한강을 모두 밟는 셈이다.
한강을 다르게 보게 되는 이유
<<무빙>>을 보고 나서 한강과 그 언저리가 달리 보였다는 사람이 많다.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가장 현실적인 동네 위에 얹혀 있어서다. 그 대비가 왜 강력한지, 이 드라마가 1990년대 첩보 서사에서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는 계보를 따라간 글에서 이어진다.
걷고 나서 남는 결론은 단순하다. <<무빙>>은 강 동쪽의 동네를, <<한강>>은 강 그 자체를 보여줬다. 강동구 골목에서 광나루의 흙길로, 여의도의 괴물 조형물에서 강서습지의 풀밭까지. 하나의 강을 두고 두 드라마가 완전히 다른 얼굴을 골라냈고, 그 두 얼굴이 실제 지도 위에서는 자전거길 하나로 이어져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덕분에 오래 기억에 남는 코스다. 드라마 속 공간과 현실 공간이 겹치는 느낌은, 결국 직접 가서 서 있어봐야 이해된다.
글: Jacky — 제주·서울, KStoryWorld 운영자
이미지: View to the northeast from Lotte World Tower by Christophe95 · CC BY-SA 4.0 · via Wikimedia Commons